사진 발명의 의미
사진이 발명되고 난 뒤 세상과 사람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사진의 발명은 단지 하나의 새로운 기술이 나 기계가 발명된 데에 그치지 않고 시각문화를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무엇보다 사진은 볼거리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근대 인의 욕구를 충족시켰습니다. 근대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 이 한 장소나 공간에서 살던 것에서 벗어나 장소를 확장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특히 도로의 확장과 기차의 발명은 공간의 이동을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넓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작은 공간적 제약에서 벗어난 인간들은 새로운 볼거리를 많이 보게 되었고, 그럴수록 더 새롭고 다양한 볼거리를 욕망하게 되었습니다. 사진은 그러한 욕망에 부응하여 새로운 장소와 공간, 시간을 보게 해 주었고, 인간의 눈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해 줌으로써 시각경험의 차원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다음으로, 사회경제학적으로 볼 때 사진은 이미지 생산 방식을 변화시킴으로써 대량, 신속, 정확한 이미지 생산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전에 이미지를 얻는 방식은 화가가 오랜 시간이 걸려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이미지를 얻기까지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고, 가격도 비쌌습니다. 그러나 부르주아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 그러한 값비싼 방식은 맞지 않았으며, 더욱이 기계가 돌아가듯 빠르게 돌아가는 시간성에도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산업자본주의에 걸맞은 이미지 생산매체가 바로 사진이었습니다. 사진은 기계가 만들어 내었고, 싼 값에 빠르게 대량으로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또 사진의 선명한 이미지가 사람들의 시대적 감수성과도 잘 맞았습니다. 이렇게 사진은 이미지의 생산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치경제학적으로 볼 때 이미지를 민주화, 대중화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림은 비싸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제작매체였고, 때문에 일부 특수계층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대중문화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사진은 많은 사람 즉 대중이 사진을 가질 수 있도록 했고, 사진을 소유한다는 것의 민주화를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와 사진의 장점들이 사진의 확산과 대중적 인기를 가져왔으며, 오늘날까지 중요한 이미지 생산매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진의 확산
사진은 발명 직후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시대가 요청하는 이미지 생산 방식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 따라 19세기 중반에는 대개의 사진적 정복이 이루어졌고, 오늘날과 같은 사진의 광범위한 활용 영역은 이때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가장 많은 대중적 관심을 받은 분야는 초상사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 초상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또 이후 탐사, 풍경, 동작, 산업, 경찰, 범죄, 학술, 조사 등 사진이 쓰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많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사진이 독자적인 영역으로 개척한 것이 저널, 예술, 광고 등의 분야입니다. 첫 번째, 포토저널리즘입니다. 이미지와 언어의 복합체를 통해 인간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주로 정보 전달의 목적을 가지고 있으나, 때에 따라서는 사진을 보는 독자들이나 네티즌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려는 계도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 번째, 예술사진입니다. 사진가의 생각과 느낌, 문제의식을 다양한 형식으로 담아냅니다. 우리 사회와 문화에 대한 사진가의 해석이 들어 있습니다. 전시장이라는 예술제도 안에서 소통됩니다. 세 번째, 광고사진입니다. 이미지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광고주가 전달하는 상품에 대한 구매력을 가질 수 있도록 소비자 설득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이미지가 좋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구매와 연결될 수 없는 사진이라면 의미가 퇴색될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과학과 의학을 비롯한 학문 분야에서 사진은 사실을 증명하는 과학적 방법론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장르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으며, 여러 장르가 혼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광고에 예술사진을 도입하거나 저널 사진을 사용하기도 하고, 예술사진에 광고나 광고적 기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의류업체인 베네통 사는 의류와 전혀 상관없는 이미지를 광고로 사용하였습니다. 기름 유출 사고로 바다가 오염되면서 기름을 뒤집어쓴 새의 사진은 뉴스 사진이지만 광고 캠페인에 쓰이면서 구매욕구 자극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게 됩니다. 이 광고는 상당히 강렬한 전달력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한국 사진의 도입
사진은 우리나라에 언제 어떤 경로로 들어오게 되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진은 서구에서 발명되어 아시아로 소개된 문물입니다. 1839년 사진 발명이 공포된 이래 사진은 빠르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가장 먼저 받아들였는데, 중국에는 아편전쟁 기간(1840~1842)에 외국 선교사들을 통해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엔 1841년 설, 1843년 설, 1848년 설 등 여러 설이 있습니다. 이중 1840년대 초에 일본에 들어온 다게레오타입 사진을 쇄국정책에 의해 되돌려 보냈다가 1848년 우에노 순노지요우가 다시 수입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1860년대에 중국으로 갔던 사신 일행 중 서양인들과 접촉이 가장 쉬웠던 역관들이 사진을 처음 접하고 자신의 사진을 가지고 조선으로 들어왔던 것 이 최초의 사진 전래로 여겨집니다. 현재 남아 있기로는 1863년 역관 오경석의 초상사진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진술이 아닌 사진을 가지고 들어왔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진 도입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후 조선인이 사진술을 배워 직접 사진을 찍게 된 것은 기록상 1880년대에 와서부터이며, 1884년 3월 16일 퍼시 발 로웰과 지운영이 고종황제를 촬영한 날을 최초의 사진 도입일로 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 사진 촬영 기록이 있지만, 조선의 황제를 조선인이 찍었다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도입일입니다. 한편 우리에게 사진은 주체적인 도입보다는 수동적인 피사체로 접했던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19세기 문호개방 이후 서구 열강의 수많은 정치인, 군인, 선교사, 공적, 사적 탐험가가 아시아에 들어왔고, 그들은 알려지지 않은 땅, 조선에 대한 자료 수집을 위해 수많은 사진을 촬영하였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풍습과 지형, 자원 등 조선에 대한 자료 수집을 통해 조선에서의 패권을 먼저 잡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조선 강점 이전에 이미 조선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사업을 통해 통치와 관리를 수월하게 만들었고, 대외적으로는 조선을 수동적이고 나약한 존재로 보여 주는 이미지를 제작하여 강점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정치를 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사진은 아픈 역사의 첨병이 되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사진 도입에 대해 깊이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